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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혼잡료, 인류 역사상 가장 무의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교통혼잡료 재개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17일 뉴욕포스트에 따르면, 당선인은 교통혼잡료에 대해 “인류 역사상 가장 무의미한 세금”이라고 밝혔다.   그는 ‘womankind’ 표현을 통해 사회 취약계층에게 특히 부당한 세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당선인은 교통혼잡료 재개를 막기 위해 내년 1월 20일 백악관 입성 후 어떤 조치를 취할지는 아직 밝히지 않은 상태다.     당선인은 “캐시 호컬 뉴욕주지사를 존중하지만, 교통혼잡료는 반대한다”며 “뉴욕주는 타주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처할 것”이라고 했다.   공화당은 행동에 나섰다.   마이크 롤럴(공화·17선거구) 연방하원의원은 “교통혼잡료는 사기”라며 반대 홈페이지(congestionpricingsucks.com)를 개설했다.   그는 “당선인이 교통혼잡료를 취소할 명분은 충분하다”며 “뉴욕시 교사노조(UFT)와 비토 포셀라 스태튼아일랜드 보로장이 제기한 소송 결과에 따라 1월 5일로 예정된 시행일은 지연될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또 한 공화당 관계자는 “내년 즉시 초당적 취소 법안을 제출하겠다”며 “트럼프 행정부 명령에 따라 시기는 앞당겨질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가운데 샘 슈와츠 전 시 교통국장은 “트럼프는 법을 따를 필요가 없으므로(generally doesn’t) 연방 지원을 멈출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편 계획대로라면, 내년 1월 5일 주간 승용차 기준 9달러를 부과하는 교통혼잡료는 런던 모델을 따라 2028년까지 12달러, 2031년 이후엔 15달러로 오른다.   강민혜 기자교통혼잡료 역사상 교통혼잡료 인류 교통혼잡료 재개 인류 역사상

2024-11-17

[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이중 슬릿 실험

어려운 말 같아 보이지만, 무엇을 두 곳의 좁은 틈 사이로 통과시켜서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려는 실험을 뜻한다. 하지만 이 간단한 실험 때문에 인류 역사에 이름이 남은 뉴턴은 체면을 구겼다.     17세기가 될 때까지 우리는 물체를 떨어뜨리면 그 무게 때문에 당연히 땅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공중에 들고 있던 사과를 놓으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어서 누구도 왜 땅으로 떨어지는지 의심해 보지 않았다. 사과가 하늘 위로 솟구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자연의 진리였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최초로 그런 현상에 의심을 품고 왜 그런지 궁금했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이작 뉴턴이다.     뉴턴은 질량을 가진 물체는 서로 끌어당긴다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 질량이 클수록, 그리고 두 물체 사이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당기는 힘은 강하다고 했다. 뉴턴은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위대한 뉴턴의 말에 시비를 거는 것 자체가 과학자이기를 포기한 행위였다. 뉴턴은 빛에 관해서도 연구를 많이 했는데 그는 빛이 입자의 흐름이라고 생각했다. 대과학자 뉴턴이 빛은 입자라고 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따라야 하는데 토머스 영이라는 신출내기 과학자 한 사람이 빛은 파동이라고 토를 달았다.     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당연히 과학계에서 퇴출당할 줄 알았는데 그의 이중 슬릿 실험으로 빛은 입자가 아니라 파동이라고 교과서를 다시 쓰게 될 판이었다.   만약 빛이 입자였다면 두 틈 사이를 지날 때, 그러니까 이중 슬릿을 통과하려면 두 슬릿 중 한 곳만을 통과해야 하는데 입자라고 굳게 믿었던 빛은 두 군데 틈을 동시에 지난 후 간섭 효과를 보였다. 간섭은 파동에서만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뉴턴이 말씀하셨다고 해도 문제였다.     그 후 더욱 정교한 실험을 통해 빛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라는 이중성이 밝혀졌다. 하지만 입자설과 파동설은 같이 공존할 수 없는 이론이기 때문에 당시 물리학계의 일대 사건이었다.     이상한 것은 우리가 관찰하는 순간에 그 상태가 바뀐다는 것이다. 마치 피 관찰 물체가 외부에서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상태를 바꾸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양자역학의 세계다. 측정된 정보에 의해서 정확한 예측을 하던 고전물리학자들은 이런 신비스러운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예 받아드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하늘의 달은 우리가 쳐다보든 보지 않든 항상 떠 있는 천체다. 하지만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보면 하늘의 달도 관찰자인 우리가 보는 순간 그 자리에 존재할 뿐 항상 있는 물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오죽했으면 아인슈타인이, "그렇다면 우리가 관찰하기 전에는 하늘에 달이 없다는 말이냐?"고 역정을 냈다는 일화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양자역학의 근간인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절대적이지 않고 확률로 존재하는 것이다.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 같은 토머스 영의 이중 슬릿 실험 때문에 빛의 이중성이 밝혀지고 결국, 양자역학이란 거대한 문이 열렸다. 빛은 입자의 성질도 갖지만 동시에 파동의 성질도 갖는데 이를 빛의 이중성이라고 한다.     토머스 영의 간단한 이중 슬릿 실험으로 철통 같은 뉴턴의 벽을 넘어 양자역학이 시작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작가)       박종진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슬릿 실험 실험 때문 이중 슬릿 인류 역사상

2024-04-12

[살며 생각하며] 남자를 자르고 2000년을 산 사마천

고금의 지극한 글이란 모두 피눈물로 이루어진 것이다. 언제나 사람들의 손과 입을 떠나지 않는 글이란 피를 찍어 쓴 것들이다. 그 글에는 군말이 없다. 자기 자랑도 없다. 절절한 내면의 깊은 울림만이 샘솟는다. 삶에 지쳐 절망에 빠질 때, 나는 사마천(司馬遷)을 떠올린다.  2000년이 넘도록 그 사내를 가리키는 단어는 궁형(宮刑)과 〈사기(史記)〉였다. 이 완벽한 암(暗)과 명(明)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수염 없는 남자 사마천의 일생에 대한 관심은  〈사기〉의 파란만장함이 지은이의 삶에도 녹아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비롯된다.      사마천이 남긴 〈사기〉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3000년 통사다. 사마천은 당시 자신이 섬기던 한 무제에게 밉보여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미처 마치지 못한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성기를 잘라내는 궁형(宮刑)을 자청하고 풀려나는 치욕을 감수했다. 그는 〈사기〉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사람의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이것은 죽음을 쓰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천명과 인간세상을 통찰한 불후의 역사서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이 남자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치욕인 궁형을 당하고 나서 그 울분을 친구 임안(臨按)에게 토로하면서 죽음에 대해 한 말이다. 사형을 선고받고 궁형을 자청하여 풀려나기까지 사마천은 3년 가까이 옥에 있었다.    지독한 고문에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여러 차례 자결을 생각했다. 당시 지식인들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는 것은 얼마든지 용인되었다. 하지만 사마천은 죽음 대신 수치스러운 궁형을 택했다.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아니 〈사기〉의 내용을 완전히 바꾸기 위해서였다. 사마천은 감옥에 있는 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늘의 도는 사사로움이 없어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고 한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착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들은 굶어 죽었다. 공자는 일흔 명의 제자 중 안연(顔淵)만이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했다. 하지만 안연은 항상 가난해 술지게미나 쌀겨 같은 거친 음식조차 배불리 먹지 못했다. 또 젊은 나이에 죽었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베푼다고 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춘추시대 말기 도적인 도척은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간을 회 쳐 먹었다. 온갖 잔인한 짓을 다하며 돌아다녔지만 하늘이 내려준 목숨을 다 누리고 죽었다. 도대체 하늘의 도는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시작으로 인간의 행위와 사상에 관한 깊은 통찰을 했다. 그리하여 복잡다단하고 다중적인 인간의 본성과 그 행위에 대해 누구보다 치밀한 분석을 가할 수 있었다. 나아가 보통사람들이 역사를 추진하는 원동력임을 확인했다. 그리하여 〈사기〉는 지배층 위주가 아닌 수많은 보통사람들의 역사서로 거듭날 수 있었다.    〈사기〉의 진정한 가치는 여기에 있다. 이것을 철학적, 윤리학적으로 말하면 이른바 도덕과 행복의 관계 문제에 해당한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행복하고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불행하다면 도덕과 행복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할 까닭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늘의 도, 하늘의 이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침묵한다.     사마천은 스무 살 무렵 천하를 떠돌며 역사의 현장을 찾아 현지인들은 물론 땅 밑에 잠들어 있는 과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혼이 담긴 문장을 통해 이들을 불러냈다. 〈사기〉를 읽을 때마다 새삼 발견하게 되는 그 생생함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마천이 걸었던 길을 걸으면서 새삼 인간의 길을 묻는다. 사마천이 궁형을 받은 것은 그의 나이 48세 때의 일로 3년 후 출옥했다. 성기를 잘린 37세의 사마천-. 그 비분과 원한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러한 원인은 자살로까지 사람을 몰아붙이는 절망으로 통한다. 이러한 원한은 복수의 집념으로 해서 잔학한 비수로 화할 수도 있다. 이러한 원망은 자포자기의 늪으로 사람을 끌고 가는 허무감으로 경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붓을 들었다. 역사와 인생의 변천과 그 실상을 적어 최후의 심판자가 누구인가를 정립하여 스스로의 사명을 통해 자기증명을 만세에 제시하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이 곧 〈사기〉다. 130권. 52만 6500자. 당시엔  종이가  없었다. 그는 이것을 대쪽[竹簡]에 한 자 한 자 썼다. 죽간 하나에 200자씩을 쓴다고 하고 20수만 쪽이 되는 것이다. 쑥처럼 흐트러진 머리와 때 묻은 얼굴로 밀실에 앉아 십 수 년 동안 묵묵히 죽간에 글을 써넣고 있는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섬뜩한 생각마저 든다.     사마천은 기록되지 않으면 영원히 묻히고 말 가슴 아픈 이름들을 위하여, 그들의 행적을 한 자 한 자 새겨 세상 앞에 드러냈다.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고 약자를 옹호했다. 역사가 앞에서는 절대권력자도 그저 작은 먼지 같은, 지나가는 자연현상과 비슷할 따름이었다. 기록자는, 기록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후세의 사람들은 사마천을 간언ㆍ궁형ㆍ저술로 이어진  그의 치열한 인생을 평가해 ‘중국의 최고 역사가’라고 부른다.  살며 생각하며 사마천 남자 남자 사마천 치욕인 궁형 인류 역사상

2021-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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