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남자를 자르고 2000년을 산 사마천
고금의 지극한 글이란 모두 피눈물로 이루어진 것이다. 언제나 사람들의 손과 입을 떠나지 않는 글이란 피를 찍어 쓴 것들이다. 그 글에는 군말이 없다. 자기 자랑도 없다. 절절한 내면의 깊은 울림만이 샘솟는다. 삶에 지쳐 절망에 빠질 때, 나는 사마천(司馬遷)을 떠올린다. 2000년이 넘도록 그 사내를 가리키는 단어는 궁형(宮刑)과 〈사기(史記)〉였다. 이 완벽한 암(暗)과 명(明)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수염 없는 남자 사마천의 일생에 대한 관심은 〈사기〉의 파란만장함이 지은이의 삶에도 녹아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비롯된다. 사마천이 남긴 〈사기〉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3000년 통사다. 사마천은 당시 자신이 섬기던 한 무제에게 밉보여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미처 마치지 못한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성기를 잘라내는 궁형(宮刑)을 자청하고 풀려나는 치욕을 감수했다. 그는 〈사기〉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사람의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이것은 죽음을 쓰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천명과 인간세상을 통찰한 불후의 역사서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이 남자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치욕인 궁형을 당하고 나서 그 울분을 친구 임안(臨按)에게 토로하면서 죽음에 대해 한 말이다. 사형을 선고받고 궁형을 자청하여 풀려나기까지 사마천은 3년 가까이 옥에 있었다. 지독한 고문에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여러 차례 자결을 생각했다. 당시 지식인들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는 것은 얼마든지 용인되었다. 하지만 사마천은 죽음 대신 수치스러운 궁형을 택했다.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아니 〈사기〉의 내용을 완전히 바꾸기 위해서였다. 사마천은 감옥에 있는 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늘의 도는 사사로움이 없어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고 한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착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들은 굶어 죽었다. 공자는 일흔 명의 제자 중 안연(顔淵)만이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했다. 하지만 안연은 항상 가난해 술지게미나 쌀겨 같은 거친 음식조차 배불리 먹지 못했다. 또 젊은 나이에 죽었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베푼다고 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춘추시대 말기 도적인 도척은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간을 회 쳐 먹었다. 온갖 잔인한 짓을 다하며 돌아다녔지만 하늘이 내려준 목숨을 다 누리고 죽었다. 도대체 하늘의 도는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시작으로 인간의 행위와 사상에 관한 깊은 통찰을 했다. 그리하여 복잡다단하고 다중적인 인간의 본성과 그 행위에 대해 누구보다 치밀한 분석을 가할 수 있었다. 나아가 보통사람들이 역사를 추진하는 원동력임을 확인했다. 그리하여 〈사기〉는 지배층 위주가 아닌 수많은 보통사람들의 역사서로 거듭날 수 있었다. 〈사기〉의 진정한 가치는 여기에 있다. 이것을 철학적, 윤리학적으로 말하면 이른바 도덕과 행복의 관계 문제에 해당한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행복하고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불행하다면 도덕과 행복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할 까닭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늘의 도, 하늘의 이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침묵한다. 사마천은 스무 살 무렵 천하를 떠돌며 역사의 현장을 찾아 현지인들은 물론 땅 밑에 잠들어 있는 과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혼이 담긴 문장을 통해 이들을 불러냈다. 〈사기〉를 읽을 때마다 새삼 발견하게 되는 그 생생함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마천이 걸었던 길을 걸으면서 새삼 인간의 길을 묻는다. 사마천이 궁형을 받은 것은 그의 나이 48세 때의 일로 3년 후 출옥했다. 성기를 잘린 37세의 사마천-. 그 비분과 원한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러한 원인은 자살로까지 사람을 몰아붙이는 절망으로 통한다. 이러한 원한은 복수의 집념으로 해서 잔학한 비수로 화할 수도 있다. 이러한 원망은 자포자기의 늪으로 사람을 끌고 가는 허무감으로 경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붓을 들었다. 역사와 인생의 변천과 그 실상을 적어 최후의 심판자가 누구인가를 정립하여 스스로의 사명을 통해 자기증명을 만세에 제시하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이 곧 〈사기〉다. 130권. 52만 6500자. 당시엔 종이가 없었다. 그는 이것을 대쪽[竹簡]에 한 자 한 자 썼다. 죽간 하나에 200자씩을 쓴다고 하고 20수만 쪽이 되는 것이다. 쑥처럼 흐트러진 머리와 때 묻은 얼굴로 밀실에 앉아 십 수 년 동안 묵묵히 죽간에 글을 써넣고 있는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섬뜩한 생각마저 든다. 사마천은 기록되지 않으면 영원히 묻히고 말 가슴 아픈 이름들을 위하여, 그들의 행적을 한 자 한 자 새겨 세상 앞에 드러냈다.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고 약자를 옹호했다. 역사가 앞에서는 절대권력자도 그저 작은 먼지 같은, 지나가는 자연현상과 비슷할 따름이었다. 기록자는, 기록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후세의 사람들은 사마천을 간언ㆍ궁형ㆍ저술로 이어진 그의 치열한 인생을 평가해 ‘중국의 최고 역사가’라고 부른다. 살며 생각하며 사마천 남자 남자 사마천 치욕인 궁형 인류 역사상